수능을 내버려두라는 학생들

2020년대의 수능은 원리위주의 공부를 우직하게 밀고 나가면 손해를 보는 시험입니다. 반대로 최적의 공략법이 있는 게임처럼, 최선의 확률을 계산할 수 있는 도박처럼 대할수록 큰 보상을 받게 됩니다. 학원 강사들마저도 '찍기 특강'을 통해 "내 과목은 찍어서 성적을 올리는 과목이다" 라고 공공연히 말을 하니까요. 지금 수능이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수단의 합목적성이나 최종적인 가치에 대한 고민은 무의미하고, 오로지 가시적인 성과(점수)만이 중요하다는 거죠.
방대한 지식을 암기하는 일은 나중에 쓸데라도 있겠지만, 지금의 수능은 마치 스도쿠와 같은 퍼즐입니다. "내가 부족한 점은 이 부분이구나" 가 아니라 "어떻게든 쟤보다 빨리 풀고 하나라도 더 맞아야지"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심지어 "이런 걸 왜 연습하고있지?" 라는 생각도 들게합니다. 물론 학생들이 스스로 풀이법을 개발했다면 논리적 사고라도 기를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강사가 만들어낸 공략법을 암기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러다보니 작년 윤 대통령의 킬러문제 배제 지시에 오히려 수험생들이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이제까지 공략해 온 수능 유형이 뒤틀려버린다면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서 다시 공략법을 찾아야하므로 매몰비용이 커지게 되니까요.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수능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학생들이 오히려 수능을 가만놔두라고 주장하는 기현상말입니다.
수능의 퍼즐화와 실전모의고사

실전모의고사는 수능과 똑같은 유형, 형식대로 만들어져있고, 중고거래에서도 매매가 활발하다
지금의 수능은 줄어든 교과범위에서 상위권 변별(줄세우기)을 유지해야하므로 문제풀이 요령이 과도하게 강조되며 퍼즐화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도 퍼즐의 해법을 숙달하고 체화하기 위해 출제원리를 공유하는 실전모의고사들이 필요해졌습니다. 학원가의 실전모의고사들은 회당 1~2만원대로 판매되고 있으며 지금 수능은 실전모의고사 없이는 대비하기 힘듭니다.
그럼 실전모의고사들은 누가 출제할까요? 어떻게 수능의 출제원리를 알 수 있는 걸까요? 바로 인터넷 수험생 커뮤니티에 해답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수험생 커뮤니티인 '오르비'가 그것입니다. 오르비에는 출제진 모집공고가 올라오며, 고3이나 N수생들도 자작문제를 업로드하고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네이버 웹툰 공모에서 아마추어 작가가 활약하고 보상을 받는 것처럼 말이죠. 특히 N수생이야말로 수능을 직접보며 문제유형의 감이 제일 좋은 집단입니다. 과거 수만휘나 파파안달부르스 등과 같은 수험생 커뮤니티는 존재해왔습니다. 저도 입시지도 때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지금은 콘텐츠를 생산, 유통, 소비하는 플랫폼으로서도 기능한다는 점이 전에 없던 것입니다.
수능 콘텐츠로 먹고사는 사교육

기출을 여러번 풀고 논리를 쌓는 종래의 공부법은 지금 수능에 맞지 않습니다. 출제 유형별 풀이 패턴을 체화하여, 실전모의고사를 얼마나 많이 풀어보느냐에 따라 점수가 달라집니다. 수험생들 역시 기출, 개념과 원리위주 학습보다는 문제풀이 위주 학습을 선호합니다. 사교육 시장은 이 수능 문제풀이 유형을 대량 생산하면 이익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수능 콘테츠 시장은 노동 집약적 산업입니다. 대량 출제도 그렇지만 오류와 검토까지 하려면 많은 인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수험생 커뮤니티에서는 고3 또는 N수생의 참여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또 학원은 강사 밑에 수많은 조교를 두고 있습니다. 이 조교들은 강사나 저자의 꿈을 이루기위해 혹사를 마다합니다. 결국 감이 떨어지면 물러나게 되죠. 이렇게 수능 콘텐츠 시장이 확대될수록 많은 N수생들이 콘텐츠 제작과 검토의 노동자로 이용되고, 또 다시 N수생으로 전락하며 콘텐츠의 이용자가 됩니다.
수능 불복

2024년 수능에서 N수생 비율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올해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데이터는 모두 사교육업체로부터 나온다.
더많은 실전모의고사를 푼다면 성적이 향상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자신의 성적이 실수라고 인식시킵니다. 최종적으로 수능 성적에 대한 불복을 가져오고, 결국 N수의 길에 들어갑니다. 1문제 차이로 대학 간판이 달라지는 현상을 보면 누구라도 받아들이기 힘들겁니다. 지금 수능은 2년간 문제를 푼 학생보다는 3년간, 아니 4년간 문제를 푼 학생이 유리한 승부니까요. 시간이 갈수록 수능은 N수생에게 유리하고 재학생에게 불리하지만, N수생들은 또다른 N+1수생들과 경쟁해야합니다. 재수생에게 밀려난 재학생들이 재수를 결심하면서, 차년도 재학생들을 다시 밀어내는 구조가 반복됩니다. 자칫하면 무한 N수의 굴레에 빠져듭니다.
서브컬쳐가 된 수험생 커뮤니티

오르비 커뮤니티 화면 캡쳐
'오르비'와 같은 인터넷 수험생 커뮤니티는 수능 콘텐츠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참여하는 신공동체입니다. 이들은 공부의 문화화라는 서브컬쳐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스타강사와 같은 사교육 종사자에 대한 선망와 의대, SKY등 인기대학에 대한 선망을 전제로 문화를 향유합니다. 이곳에서 사교육 종사자들, 의대생이나 인기 대학 합격생들은 예언자로까지 여겨집니다. 이들은 콘텐츠의 판매자인 동시에 커뮤니티 수험생들의 미래입니다. 당연히 수험생들은 이들로부터 정서적 일체감을 느끼고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오르비'와 같은 커뮤니티에서는 수능, 모의고사 성적에 따라 고유한 등급을 부여하기까지 합니다. 전국 석차 상위 1~2%이면 센츄리온, 0.1%이내이면 에피옵티무스 등급으로 말이죠. 문제는 공부이외에 다른 삶을 경험하지 못한 수험생들이 사교육 종사자의 말만 선망하게 되고,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자들에 대한 분노를 쏟아냅니다. 자신의 점수에 불복하고 또 다시 N수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매년 수능이 끝나면 이렇게 재학생과 N수생은 자리 바뀜이 이뤄집니다.
사교육만의 원서영역

사교육 입시컨설턴트가 가장 자신있는 분야가 바로 원서영역이다.
9월이면 수시, 12월이면 정시 지원이 시작됩니다. 어떤 대학, 어떤 학과에 지원해야 내 점수가 가장 유리할까? 라는 원서지원영역은 사교육이 절대적인 우위에 있습니다. 대입을 준비하다보면 대학별 내신 반영방식은 물론 수능점수반영방식이 파편화되어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시중에 판매되는 '수박먹고 대학간다'라는 책을 보면 두께가 어마어마합니다. 모두 대학별 성적 반영비율과 점수를 나열한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학생과 학부모는 정확한 원서지원 정보를 얻기 힘듭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체계적인 데이터와 입시결과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교육은 다릅니다. 강사는 사라져도 입시 컨설턴트는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듯이 정형화된 수능을 분석한 자료가 많습니다. 학생은 물론 교사조차 상담을 위해 입시학원 컨설턴트의 자료를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르비'에서는 고품질 원서지원 배치표를 공유하기때문에 수험생들은 원서지원 철이 오면 하나 둘 수험생 커뮤니티에 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공교육은 뭐하나?

수도권 주요대학의 정시모집인원이 40%을 훌쩍 넘겼고, 수능 문제풀이 원리를 체화하기위한 실전모의고사의 영향력이 커진 마당에 학교, 특히 일반고에서는 수능대비를 전혀 해주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수능 고난도 문제를 못푸는 학교 교사들도 적지않습니다. 학교에서는 일타강사처럼 문제풀이 원리를 가르칠 수도 없죠. 과거 수시 모집인원이 70%에 달했을 때만 해도 학생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수시 진학지도를 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만, 지금은 정시 문호가 넓어진만큼 모든 아이들을 학종으로 유도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무엇보다 파편화된 대학별 성적반영방식과 원서지원의 노하우가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저도 교육과정부장으로 많은 매체를 통해 꾸준히 입시 정보를 얻고있지만, 그 복잡성이 매년 증가하고 있습니다. 수시 역시 상위권 대학은 대부분 수능최저가 있어 학생부 관리만 잘해서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수시는 3년동안 학생부를 관리해야하는 마라톤이지만, 정시는 수능 당일 하루에 성패가 결정되는 단거리 경주에 비유됩니다. 무엇보다 정시비율 40%이상과 의대정원 확대가 맞물리면서 학생들은 너도나도 정시 지원이라는 단거리 경주에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고 학생부 관리를 잘해도 수능최저가 나오지 않으면 학종이라도 불합격합니다. 결국 3년동안 헛수고했다는 불만과 함께 N수의 길을 택하게 되는거죠.
대학의 자기과시

대학은 등급컷트라인을 조정하며 대학서열을 공공히 유지한다.
대학들은 수시에서는 수능최저를 조건으로 합격생을 선발하고, 정시에서는 다양한 변환표준점수를 이용해 복잡하게 합격생을 선발합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선발하는 이유는 바로 대학 서열에 관한 대학들의 자기 과시때문입니다. 등급 커트라인을 조정하여 대학들은 자신들의 서열을 확고히 합니다. 서울대가 정시 가군에서 나군으로 모집군을 변경하면 고려대와 연세대는 나군에서 서울대와 정면대결을 하지않죠. 자신들은 서울대를 먼저 쓰되, 보험이 필요한 학생들을 가져갈 수 있으니까요. 수능 과목별 변환표준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위대학이 놓친 학생들을 데려가기위해 매년 그 수치를 조정합니다. 이미 대학은 교육철학에 부합하는 인재를 선발하는게 아니라 자신들의 대학서열을 공고히 하기위한 인재, 경쟁대학보다 더 높은 컷트라인을 만들어 줄 학생들을 데려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대학들도 지금의 수능 콘텐츠 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주체라고 볼 수 있는 셈이죠. 매년 복잡하고 달라지는 수능최저기준과 변환표준점수는 고스란히 일선 학교의 교사는 물론, 학생부담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학생과 학부모는 사교육 입시컨설턴트를 찾게되며 사교육 비용을 부담하게 되겠죠.
수능을 어떻게 해야하나?
저는 수능을 절대평가화 하든지, 논술형으로 바꾼다든지 해서 지금의 입시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수능에 목매달 수밖에 없고, 수능에 목숨걸고 공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봐야합니다. 수능도 하나의 시험에 불과하지만 왜 이렇게 과도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지금 대입전형에서 수능이 과도한 지배력을 가지는 이유는 제가 볼 때, 수시와 정시, 모두 수능점수를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수시에서는 학종과 교과전형 모두 상위권 대학의 경우 수능최저기준을 요구합니다. 그러다보니 3년간 학교와 교사 지도를 믿고 학교생활, 수업활동에 최선을 다한 일반고의 대다수 학생들이 수능최저를 맞추지 못해 수시전형에 불합격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물론 해당 학생의 능력치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고등학교 3년간 내신등급을 챙기고 학생부 세특을 위해 활동에 참여하고, 수능공부까지 하는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수시에서는 수능최저를 반영해서는 안됩니다. 학생부 내신과 세특으로 서류평가를 하고, 사라진 자소서와 교사 추천서를 부활시켜 학생평가에 반영해야합니다. 대학별 교육철학에 맞게 심층면접을 개발하여 운영한다면 학생 소양과 진로역량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일반고 학생들의 수능 부담을 덜어주어 공교육 정상화에도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지균 수능최저 폐지와 정시40%에 부정적인 뜻을 비친 서울대의 2028 대입정책 포럼은 눈여겨볼만 합니다.

또 수도권 정시 모집인원 40%이상이라는 기준은 없어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수시이월인원까지 포함하면 정시모집은 50%에 육박하기 때문입니다. 대학별로 정시모집인원을 30%선에서 운영하고 정시에서는 수능100%와 일정 성적이상의 학교 내신과 출결만을 반영해서 N수생과 수능에 맞는 학생들의 진학을 위한 길을 마련해 놓는 것입니다.

출처 :인공지능 신문
수시는 학생부로만, 정시는 수능으로만 평가한다는 확고한 방침이 있다면 학생들의 학습부담이 줄고, 원서지원 시의 복잡성도 줄어들 것입니다.
수시 학종은 학생부 100%와 면접, 수시 교과는 내신 100%와 면접, 정시 수능은 수능 100%와 면접으로 선발하며, 비율은 모두 30%씩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나머지 10%는 논술과 실기자 전형으로 운영하면 될 것입니다. 물론 최종입시결과도 투명하게 공개해서 사교육이 주도권을 가진 원서영역을 공유하게 만들어야합니다.
20년동안 학생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건, 고등학교 3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이 학생들의 삶에 어떤 의미로 남아있을까 하는 의구심입니다. 대입에 실패하며 N수의 길을 택한 학생들에게는 정말 무의미하게 여겨질 테고, 대입에 성공한 학생들 입장에서도 대학이나 사회에서도 쓸모없는 지식과 문제풀이시간이 아깝게 여겨졌을 겁니다. 매년 11월 수능이 끝나고 나면 고등학교에는 커다란 폐지 수거 트럭이 찾아옵니다. 그날은 고3 수험생들에게 그동안 지긋지긋했던 교과서와 참고서가 쓰레기로 버려지는 날입니다. 학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능 전달까지 풀던 실전모의고사역시 쓰레기 신세를 면하지 못합니다.
수능이라는 시험에 열광하는 대한민국 학생, 학부모의 매몰비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버려지는 쓰레기 양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요. 수능 콘텐츠를 판매하며 확대되는 사교육의 영향력과 사교육의 문제출제자로 혹은 이용자로 혹사당하는 N수생들, 그 속에서 이익을 챙기고 서열을 강화하는 대학들, 전문성이 부족한 공교육 교사들,
분명한 건, 우리사회의 지적, 물적, 시간 낭비가 심하다는 겁니다. 물론 수능 수험생들의 노력과 고통을 폄하해서는 안됩니다. 마땅히 부단한 노력에 대해서는 박수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A I시대, 번뜩이는 창발성은 5지선다의 문제 풀이와 찍기로부터는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수능만 쳐다볼게 아니라 수능이후, 우리 사회와 자녀들의 삶, 스스로의 미래도 생각해봐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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