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과학기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회문화 예술분야의 변화도 눈부십니다. 그만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면한 문제의 정답도 하나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시대입니다.
하버드의 생각수업의 저자 후쿠하라 마사히로는 정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와 진지하게 마주함으로써 생각하는 힘을 키우고 제3의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는가?
19세기 활약한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않는 한 인간은 자유롭다고 말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유롭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멋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밀은 자유란 상호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것으로 의무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어떤 희생을 짊어지워도 괜찮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자유하면 떠올리는 개념과 매우 비슷합니다.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생각하는 자유는 다릅니다. 칸트는 자유란 인간이 본래 지닌 도덕관(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으로서 정말 올바른 행위라고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가령 회사에서 업무시간 이후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행동은 올바른 이성에 바탕을 둔 행동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나가다 달콤한 탕후루 향을 맡고 탕후루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자유의사일까요?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은 외부의 영향을 받은 욕망이지, 순수한 이성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므로 자유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각종 뉴스나 매체에 영향을 받는 현대인들이 과연 자신의 판단이 자유의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SNS는 특정 관점이나 사고방식을 순식간에 전파시켜 여론을 조작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기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자유의사를 다시 한번 의심하고 검증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정부는 시장에 개입해야하는가?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여 실업자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 인물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입니다. 그는 시장이 수요과 공급의 균형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기업의 생산이 줄면 종업원을 해고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실업자가 늘어나고, 더욱 수요가 감소하는 악순환에 빠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수요가 감소하면 경제는 쇠퇴할 뿐이니 무엇보다도 수요를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케인스의 이론은 정부가 공공사업을 실시하여 실업자에게 일자리와 임금을 주면 실업자가 줄고 수입을 얻게 되어 원하는 물건을 사게되며 다시 수요가 자극을 받아 경제가 활성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1930년대 미국에서는 뉴딜정책이 성공해 대공황을 극복하였고, 케인스의 이론에 상당한 설득력 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하지만 국가에 돈이 없다면 어떻게 공공사업을 실시할 수 있을까요? 케인스의 이론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국가가 빚을 져서 경제 정책을 실시해도 효과를 보지못하고 빚만 떠안을 위험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정부의 부채가 늘어나면 언젠가는 증세가 될 것으로보고 사람들은 현재의 소비를 줄이기 마련입니다.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정부는 과도한 개입을 삼가고 시장에 맡겨야한다고 주장하는 시장경제 중시파였습니다. 그는 자유방임이 아닌 자각을 지닌 엄격한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하이에크는 개인이 사회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경제가 정체되어 실업자가 늘어나더라도 일단은 그 환경, 상황에 개인이 적응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또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면 특정 기업이 이익을 보게되므로 시장을 민간의 자유에 맡기되, 일부만이 이익을 보는 시스템을 없애야한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자원을 모든 사람이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효과적으로 투입해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실업자에게 당장 일자리와 돈을 줘서 수요를 자극하자는 케인스의 이론에 비하면 다소 비현실적이고, 중장기적인 시야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는 일본의 장기침체를 들여다보면 국가의 시장개입과 과도한 부채에 의지한 경제정책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과학기술의 진보와 자연보호는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인터넷과 스마트폰, 최근에는 AI의 기술발달에 힘입어 우리의 삶과 비즈니스 스타일은 크게 변하고 있습니다. 도로에는 무인 자율주행 자동차가 돌아다니기 시작했으며, 생명과학과 유전공학 기술은 100세 시대를 준비합니다. 우주과학 기술은 달 탐사에 이어 화성 식민지 개척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17세기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실천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공부하면 물이나 불, 천체나 하늘 같은 자연계의 구성요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관념적인 철학이 아니라, 실천적인 철학, 즉 과학기술을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는 실천적인 철학을 통해 물체의 힘이나 작용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은 자연의 주인, 소유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데카르트의 시대에 비해 오늘날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과학기술이 발달했습니다. 인간은 과거보다 좀 더 자연의 소유자에 가까워진 셈입니다.
미국의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은 저서 '침묵의 봄'에서 자연파괴와 환경문제를 고발했습니다. 그녀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자연의 모습을 바꿔 나가면 오히려 인류 자신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아무리 노력해도 자연을 소유하거나 정복하거나 제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데카르트의 주장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녀는 생물과 생물의 관계는 그물처럼 촘촘하게 엮여 있으며, 모든 생물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연결되어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인류가 추진해 온 과학기술의 발전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이며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비판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동식물 다양성 보전과 자연보호에 이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프레온 가스를 줄이는 노력으로 남극의 오존층도 과거보다 그 크기가 줄어들었다고 하니까요. AI의 발전이 인류 문명의 번영과 생태계 유지에 도움을 주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책을 읽는 내내, 머리 속에서 여러 주제에 대해 생각하며 나의 가치관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정답이 정해져있지 않은 문제에 나만의 관점으로 접근해보는 용기도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필터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사실을 받아들이는 방식또한 사람마다 다릅니다. 각자의 인식의 차이를 깨닫지 못하면 생산적인 토론을 할 수 없습니다. 나와 다른 사고를 가진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이려면, 우선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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